박노해 사진전 [라 광야]
작가의 글 _ 박노해

1
많은 광야를 걸어왔고
막막한 사막을 건너왔다.

 

기나긴 군사독재 아래서
철야 노동과 해고와 최루탄 터지는 거리와
지하밀실 고문장과 수배 감옥 길을 걸어 나와
자유의 몸이 된지 10년.
나는 자신의 발바닥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낙타처럼
국경너머 전쟁터와 기아 분쟁현장을 걸어 다녔다.

 

2
눈물 흐르는 지구의 골목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검은 연기와 시체 썩는 냄새가 흐르는 폐허더미에서
아이들과 여인들의 미칠 것만 같은 흐느낌 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그저 곁에서 함께 울어주고 어깨를 안아주고
총성이 그치면 아이들과 바람 빠진 공을 차며 놀아주는 일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력한 시인의 무력한 사랑이었다.
나밖에 읽어줄 사람이 없는 작은 수첩에
감추어진 그들의 진실을 수없이 기록했지만
국경을 넘는 순간 언어의 국경을 넘지 못하는 나의 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3
오래된 만년필을 쥐고 있던 내 손에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가 함께 들려졌다.
절실한 필요는 창조를 낳는 걸까.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20리 밤길을 단숨에 달려가는 어머니처럼
나는 현장의 진실을 카메라에 담아가고 있었다.

 

시인은 어둠 속에 모국어로 시를 쓰지만
절실하면 국경을 넘어 빛으로 시를 쓴다,
마음이 사무치면 꽃이 핀다!
무릎 꿇은 낙타처럼 홀로 되 뇌이며.
그렇게 지난 10년 동안 침묵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시를 써왔다.

 

4
참혹한 가난과 분쟁 현장에서 나는 충격적인 장면과
극적인 이미지를 향해 다가서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고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먼저 그 사건이 발생한 삶의 뿌리로 스며들어간다.
수 천년 이어온 삶의 터무늬(地紋) 위에서 지속되는 삶,
경작하고 노래하고 아이를 낳고 차를 마시고 기도하고
꿈꾸고 저항하는 민초들 속으로 혈육처럼 나직이 스며들어간다.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폐허더미에서도 협동하며 일어서는 강인한 생활력,
최선을 다해 절제하고 서로 나누고 보살피는 인간의 위엄,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신 앞에 무릎 꿇는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광야의 사람들에게
나는 다만 경외의 마음을 가질 뿐이다.

 

우리가 언제부턴가 잃어가는 빛나는 그 힘,
마지막 남은 종자 같은 재생(再生)의 힘 앞에,
카메라를 들기 전에 나는 먼저
광야의 낙타처럼 무릎을 꿇는다.

 

5
지금 이 시간에도 중동의 골목길에서는
폭음이 울리고 아이들과 여자들의 울음 소리가 흐르고 있다.
흐르는 눈물을 카메라 뷰파인더에 가리며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젖은 눈빛으로 다가와 건네던 그 분들의 말을 그대에게 전한다.

 

“총알은 언젠가 바닥이 나겠지만
샤이를 마시는 건 영원하지요.
먼데서 온 친구여, 우리 함께
갓 구운 빵과 샤이를 듭시다.”


박노해 <작가의 글> 중에서

* 전문은 <라 광야>展 도록에 실려있습니다.